검은 날개의 회색빛 - 본문 일부


재작년.. 그러니까 2년전에 썼던 글입니다. 내가 썼던 에로 소설들과 관련된 것인데... 제목에서도 짐작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3번째로 연재한 장편 야설 '검은 날개의 회색빛'입니다. '판타지'나 '로시니안 천사들'과는 달리 이건 아직까지 하드에 저장되어 있군요; 참 간만에 읽어보니 묘하게 느낌이 색다르더랍니다. 이상한 재미같은 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다음은 그 제가 썼던 소설 중 일부를 올려본 겁니다. 꽤 오래 전에 쓴 거라 묘사라든지 표현이 좀 딱딱해 뵐수도 있겠습니다만 참고하고 읽으셨음 합니다. 15화 중 1편과 16화 중 2편입니다. 첫번째 것은 마을 골목에서 발키리와 도플갱어의 조우이고 두번째 것은 또다른 주인공인 우리의(...) 카리스가 연구실 내부에서 늙수그레한 메트라치 학자를 만나는 장면입니다.(일부 오타나 단어는 표준어에 맞게 약간 수정한 게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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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1


"도플갱어(Doppelganger)... 라고?"

꾹 닫혔던 그녀의 입이 드디어 열린다. 길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내가 누군지 알겠나? 크크크..."

소녀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녀의 몸은 온통 흙과 정액을 뒤집어쓰고 있었고, 에이프런 드레스는 몇 가닥만 허리와 어깨에 간신히 걸쳐져 있었다. 길니스는 다시 한번 이 발키리(Valkyrie)란 년을 완벽히 점령했다고 온 몸에 전율이 왔다.

"난 도플갱어에 대해선 잘 몰라. 하지만 네가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군"

그녀는 하늘거리는 드레스 조각을 떨쳐서 옆으로 버렸다. 순간, 소녀의 눈동자 가운데가 하얗고 투명하게 반짝였다. 동시에 그녀의 몸이 새하얀 빛을 발하며 공중으로 작고 동그란 입자들이 비산한다.

"......?"

길니스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발키리의 몸이 눈부시게 빛나며 수많은 점들이 공중에 떠올랐기 때문에. 그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앞으로 내밀어 그것들을 건드려보았다. 손가락에 묻어나오는 그것은...

"...먼지?"

그녀의 몸에 묻었던 흙들과 말라가는 정액 입자들이 떨쳐져나와 공중으로 흩뿌려지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럴수가! 이것이 천사의 능력?

발키리의 몸에서 새어나오는 빛은 조용히 발산했다 조용히 사라졌다. 그러면서 주변은 또다시 어둠속에 잠겼다. 손가락에 묻은 먼지들을 멍하니 응시하던 길니스가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니, 이미 그녀는 또 다른 옷을 생성해 몸에 걸치고 있었다. 가벼운 갈색 평상복 차림의 소녀로.

"난 사람이 아닌 자에게는 흥미없어. 하지만 참고는 해 둘래"

그리고 그녀는 덤덤하게 돌아섰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골목 밖을 향해 걸어나가는 발키리. 길니스는 멍청하게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하다 팍 달려들었다.

"이게...! 내가 뭣 때문에 정체를 밝혔는데"

그리고는 소녀의 어깨를 콱 움켜쥐는 길니스.

"여기가 네년 무덤이라는 것을 인지시켜주기 위해서다!"

그리곤 조금 전처럼 그녀를 땅바닥에 던져버리려 했다. 하지만 그건 실수였다. 발키리는 애초에 길니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가벼운 존재가 아니었기에.
도플갱어가 아무리 강하다 하지만 그건 인간계의 척도다. 신들간의 전쟁에서도 가장 두려운 전사가 바로 이 발키리다. 아름다움 처녀의 모습으로 전장을 수놓는 그녀는 적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도플갱어란 몬스터는 아무리 세봤자 거기서 거기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상식을 벗어나는 그녀의 입자조절(粒子調節) 능력을 보았을때부터 길니스는 이미 깨달아야 했다.

"으응...?"

그가 아무리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봐도 처음처럼 들어지지가 않는 건 당연한 일. 소녀는 가만히 있다가 어깨에 걸쳐진 그의 손을 붙잡고는 한손으로 오히려 그를 뒤에서부터 앞으로 매다꽂았다. 숨 한번 고르지 않고 가볍게.

꽈당탕-!!

"크... 헉!!"

심하게 땅과 충돌한 도플갱어의 입에서 괴로운 비명이 터져나왔다. 어찌나 세고 빠르게 넘어갔는지 그는 마치 뭔가의 마술에 걸린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방금 뭐가 일어난 거지?

"허억... 허...... 쿠... 쿨럭!!"

내장이 타격을 입은 듯 그의 입에서 선혈이 흘러나왔다. 등에서부터 말로 표현못할 아픔이 주르륵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는 일어설 생각도 못하고 그 한방에 몸을 뒤틀며 괴로워했다.

"쿨럭...! 쿨럭쿨럭!! 아..... 아으으...!!"

그녀는 무표정한 시선으로 그런 그를 내려다보다 발로 가슴을 콱 짓밟았다. 도플갱어의 두 눈이 커진다.

"길니스라 했니? 잘 들어"

그녀는 몸을 굽혀 그의 가슴을 짓누르는 무릎에 두 손을 모으고 얹혔다. 그리곤 생긋 웃으며 내려다보았다. 길니스는 입에 피를 머금곤 빠져나오려 무진 용을 썼지만 소녀의 조그마한 발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나는 인간의 성(性)에 관심이 있어 천상계(天上界)에서 내려왔을 뿐이지 너같은 존재는 흥미없어. 어차피 이곳에서 조금 특출하게 태어난 몬스터라면 내가 뭘 하든 신경쓰지 말고 수준에 맞게 놀라구. 알 - 겠 - 나 - 요 도플갱어씨?"

그녀는 어쩐지 즐거운 듯 마지막 말을 주욱 늘려서 했다. 길니스는 경고가 들리는지 마는지 그녀의 발에 짓눌려 숨소리 하나 제대로 못내고 얼굴이 벌개져 있었다. 그는 곧 죽을것처럼 몸을 뒤틀었다.
이윽고, 소녀는 살짝 발을 떼었다.

"푸합-!!"

"네 자지는 꽤 괜찮았어. 항문으로 해준것도. 그럼 안녕"

그 말만 남긴 발키리는 총총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도플갱어는 간신히 몸을 옆으로 굴러 고개를 땅으로 처박고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에 땀이 비오듯 쏟아져내렸다. 그는 피와 침이 섞인 타액을 한참 뱉어내다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옆으로 해 그녀쪽을 보았다.

가벼운 미니스커트 차림의 발키리는 어느 새 저만치 멀어져가고 있었다.



16 - 2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을 갑옷소리가 되도록 나지 않게 조심조심 그에게 다가갔다. 아까 그 소녀는 뭔가의 심부름을 받았는지 연구실 뒷문으로 사라졌다.

"이미 소개를 받았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메트라치 학자네. 4대원소와 물질적인 구성체를 한평생 연구해왔다고 감히 자부할 수 있지"

"대단하시군요"

"요즘 소문이 무성한 발키리의 숙주 성분을 분석하게 된 건 어떠한 사명에서였어. 내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흥미로운 일이었지만... 결과가 자네에겐 좋지 않게 나왔네"

그리고 그는 한숨을 쉬었다. 두꺼운 안경을 잠시 벗은 그는 눈가를 문지르다 한탄 비슷한 음성을 내었다.

"아니, 이 왕국의 모든 이들에게... 라고 표현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대체 무슨 결과가 나왔길래 이러는 거지? 이미 짐작은 했지만 무척이나 심란해진다. 메트라치는 여러개의 비커들 가운데서 하나를 들어 내게로 보였다. 어두운 연구실 안에 어쩐지 레몬빛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가루라고 하기엔 좀 큰 물질들이었다.

"화학 지식이 전무할 것이기에 알기 쉽게 설명해주겠네. 이건 숙주의 성기와 배 부분에 연결된 장기(臟器)에서 추출된 입자들이야. 발키리란 그 천사는 이 입자들을 무한정 생산해서 남자의 성기속에 투입시키는것 같네. 이 물질의 근원은 정확하진 않지만......"

그는 한동안 뜸을 들이다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남자의 정액을 받아낸 발키리의 음부(陰部)속에서 정체불명의 입자와 결합해 생산이 되는 모양이야"

......내가 들어도 황당한 소리다. 하지만 달리 추측할 게 없을만도 했다. 게다가 한평생 화학을 연구해왔다던 메트라치가 터무니없는 소리를 할리는 없지 않은가? 아마도 가장 가까운 근거가 생각하기도 싫은 것에 들이맞았을 것이다.
나는 조용히 물었다.

"그럼 발키리는 여성이라는 말이군요. 감염된 자들도 현재까지 확인된 바 모두 남성이었으니"

"그렇다고 봐야겠지..."

메트라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밝히고자 하는 중점은 그게 아닌 듯 싶다.

아까보다 더 뜸을 들이며 자신이 든 비커를 응시하는 화학자. 어쩐지 그의 손도 떨리는것 같다. 나는 문앞에 선 스캇쪽을 바라보았고, 그도 마찬가지로 심각한 표정이다.

"게다가 이 근원이 불투명한 입자들은 밀도가 엄청나네. 어떻게든 분리되는 다른 분자들관 달리 이 레몬빛 가루들은 절대 흩어지지를 않으니까. 나는 이 연구소의 모든 화학 물질들을 결합시키고 가열시켜 보았지만 불가능했어. 이것은 우리 인간계에 있는 입자들과는 성질 자체가 틀려. 그리고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인간들도 이 입자들의 활성화를 감당하지 못해서 전부 목숨이 끊어진채로 돌아다니게 되는 것이지"

나는 그의 말이 차라리 꿈이었다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건 완전히 상식을 벗어나는, 차원이 다른 얘기다. 그렇다면 이 입자들을 생성하는 그 발키리란 존재는......?
물어보기 꺼려지면서도 어떠한 의무상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럼 이 괴물같은 입자를 생성하는 발키리는 상상을 초월하겠군요"

"단순히 상상을 초월하는게 아냐"

그는 아무래도 설명을 인지시켜주려면 비교할 게 필요했던지 다른 비커를 꺼냈다. 푸르스름한 자갈 같은게 영롱하게 빛나는, 아름다룬 금속이다.

"이게 뭔지 아나?"

"다이아몬드... 입니까?"

"그래. 다이아 조각일세. 현존하는 가장 단단한 물질이지. 하지만 내가 이 입자들과 다이아의 밀집도, 그리고 강도를 비교 분석하고 그것을 생산하는 근원을 추리해 봤을 땐..."

그의 입에서 다음과 같이 툭 튀어나온 말은 내 머릿속 한구석을 절망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녀, 발키리의 몸은 이 다이아 강도의 수백배에 달한다..."

"......"

나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 시점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메트라치는 뒤이어 몇가지 설명을 더 보충했다. 그것은 인류의 절망적인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개인적인 보고서 제출같은 것이었지만 말이다.

"신들의 전투에서 가장 두려운 전사라고 하지? 따라서 내 분석이 거의 틀림없을 것이라 보네. 그리고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영역이기에 어쩌면 다이아 강도의 수백배가 아닌 수천배일 수도 있지. 물론, 어느쪽이나 우리같은 인간에겐 다 똑같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그는 숨돌릴 틈도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이 입자들은 강도 뿐만이 아니라 다른 능력쪽으로도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네. 발산되는 기류(氣流), 마력, 주변을 감도는 마나의 반응들을 고려해 보면 발키리는 인간이 생각할 수도 없는 다방면의 능력을 가지고 있어. 그녀는 마음만 먹으면 현실의 인간과 똑같은 질감의 몸으로도 변신할 수 있고, 어느 한부분이 상처입거나 더렵혀져도 순식간에 재생이 가능하지. 또한 주변에 도는 아무 쓸모없는 입자들도 즉석에서 재구성해 여러가지 물건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야. 그녀에겐 인간이 수백년동안 쌓아온 업적따윈 아무렇지도 않게 뒤엎을 힘을 가지고 있네"

"그럼 그런 발키리란 년에게 대적할 방법은 절대 없단 말입니까?"

나는 메트라치 학자의 분석 보고에 항의라도 하듯 이렇게 외쳤다. 가슴이 꽉 막혀오는 느낌에 '년'이란 단어까지 뒤에 덧붙이며.
정말 그랬다. 가슴이 죄여온다. 비단 이 텁텁한 공기의 연구실 내부 때문만이 아니리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덤덤하게 마음먹겠다고 다짐했건만 이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어찌하다 그런 차원이 다른 존재가 인간계에 내려와서 우리같은 사람들을 유린하고 있는거지? 대체 왜! 무엇 때문에...!

"......"

당연하게도 메트라치의 대답은 없었다. 그라고 해서 신의 천사를 대적할 답을 갖고 있으리란 전무하다.
나는 탁자에 두 손을 뻗어 짚고는 고개를 숙여 부들거렸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절망감이다. 금방이라도 바닥에 어린애처럼 주저앉아서 절규하고픈 심정이다. 그나마 내가 눈물을 흘리지 않고 버틸 수 있는것은 언제나 기사단장답게 강인한 정신력으로 매사를 처리하는 습관이 가로막아 주어서인지도 모른다.

"으... 으으......"

한동안 음울한 숨을 고르던 나는 이윽고, 등을 살며시 두드리는 느낌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스캇이었다. 그 또한 벌겋게 눈이 충혈됐지만 냉정을 잃지 않으려 하는 모습이었다.

"괜찮습니까 카리스 기사단장님?"

"...... 네, 네"

나는 간신히 평온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의식으로 내쳐진 억지스런 마음가짐이었다. 메트라치는 복잡한 표정으로 안경을 한참동안 매만지다가 말했다.

"이해하네. 보통 사람 같으면 이런 실태에 바로 문을 박차고 어디론가 가서 자살해버릴 지도 모를 일이지. 더군다나 멋모르고 이런 임무에 투입되어진 자네로서는. 내가 아까 심부름꾼 아이를 일부러 밖으로 보낸것도 그때문이네. 한명이라도 더 이 현실을 알지 않는게 좋기 때문이야"

"......"

나는 아무 대답도 않은 채, 마음 속을 진정시키려 했다.

착잡했다. 지금 이 문을 나가고 엘린과 사크, 휴겐을 비롯한 모든 병사들에게 무어라 설명해주어야 한단 말인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왕궁에 돌아가서 그렇게 보고하자... 라고 말하란 건가? 그리고 모든 걸 포기란 구덩이속으로 던져버려야 하나...? 어쩔 수 없다고 자위하며,

그렇게......

그렇게......

메트라치는 그런 나를 또 다시 안쓰러운 듯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자네에게 조언을 좀 해도 괜찮겠나?"

...거절할 이유가 없다. 지금 상황에선 그나마 정황을 잘 아는 이 메트라치 학자밖에 믿을 게 없기에. 나는 '네'라고 대답할 기운도 없이 고개를 짧게 끄덕이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일단 그녀에겐 어떠한 무기도 통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나마 가장 가능성 있는 무기를 제안하겠네"

그는 대책 또한 밤새도록 강구해온 듯하다. 나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메트라치의 입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뭐... 이것 또한 우리같은 인간계의 척도에 지나지 않지만 달리 방법이 없잖은가. 자네... 혹시 신에 대적할 만한 금속이라 불리워지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오리하르콘 말씀이십니까?"

"내가 알기로는 인간계에 가장 강력하다 명칭할 수 있는 검이 그 금속으로 만들어진 오리하르콘 검이라네. 물론, 불행히도 현재 인간이 그걸 갖고있진 않지만"

"그럼 어디서 그것을 구할 수 있죠?"

힘겹게 물어볼 나를 도와주기라도 하듯 스캇 경비대장이 입을 연다. 메트라치는 이미 그것도 다 자료를 수집했는지 곧바로 대답한다. 어쩐지 그것만은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다는 듯.

"이 테이니즈 마을에서 남쪽에 있는 벌판과 해안까지 이어진 광대한 숲, 엘븐 포레스트. 그곳에 있는 엘프족 전사 중 한명이 그것을 소유하고 있지. 물론, 이것 또한 몇년 전 손에서 손으로 전해진 학자들의 자료에 의거한 것이긴 하지만 말이야"

"신뢰도는 있습니까?"

스캇의 물음에 메트라치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정확히 몇 퍼센트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군. 엘프족 중 누가 지녔는지는 전혀 모르네.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 이 정도는 카리스, 네가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 아닌가?"

"그렇습니다"

나는 어쩐지 현실을 탈피할 목표를 쥐기라도 하듯 또박또박하게, 하지만 힘없이 대답했다. 너무나 비상식적인 얘기를 들어서인지, 아니면 이 연구실 내부의 정체불명 약품 냄새 때문인지는 몰라도 머릿속이 텅 빈 느낌이다.
그리고 한동안 우리 세 명은 얘기가 없었다. 나는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또 다른 대적법은 없습니까?"

"...이것 또한 불확실하네. 어쩌면... 이건 나같은 화학자보다는 신학자쪽이 더 잘 알지도 모르겠지만...... 어차피 정확한 답이란 존재하지 않으니 잘 듣게나"

그는 이번엔 많은 심경이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엄청난 능력을 지닌 신의 천사라 해도 그 영역을 결코 뒤집을 수 없는 부분이 있지"

"......?"

나와 스캇은 조용히 메트라치의 입만 바라본다.

"솔직히 근원부터 따지자면 발키리가 인간계에 내려올리가 없다. 하지만 그녀는 내려왔고 지금의 숙주(宿主)정황을 봤을 때 그녀는 인간의 성(性)에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다는걸 증명해준다네. 이것은 다른 의미로..."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온 그의 말은...

"그녀가 인간적인 감정도 지니기 시작했단 말이지. 이것을 잘 이용해보게나... 카리스"


15 - 1 편과는 달리 16 - 2 편에서는 시점이 1인칭으로 바뀌죠. 이런 기법도 활용했지만 내용이 길어져가니 별로 탁월한 선택은 아니었다 생각했었습니다; 물론 익숙한 분들에게는 또 다르겠지만요..

발키리(Valkyrie)... 는 판타지란 세계관에서 엘프와 서큐버스 등과 더불어 매우 신비로운 존재라 느꼈던 것 같습니다. 오딘 신을 섬기는 '싸움의 처녀'란 그녀는 신들의 전쟁에서 활약할 만큼 상식을 뛰어넘는 힘을 소지하고 있었지만, 어떠한 계기로 인간계의 성욕에 관심을 갖고 지상에 강림합니다. 그런 그녀가 인간들을 유린하는 모습에서 카리스는 절망감을 안게 되지만 발키리의 숙주(宿主)들과 싸우며 나름대로 돌파구를 찾으려 한다는 게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절망적인 상황을 타개한다.. 라기보다는 신적인 존재와 인간의 어떠한 접촉 상황에 더 포커스가 맞춰져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접촉의 근원은 역시... 인간의 마음. 네. 감정입니다. 사람의 의지를 이끌어내는 감정.. 그것은 발키리가 인간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말살시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방비책으로 작용시키려 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타 생물과 가장 큰 차이점이 바로 이 감정에 의거한다는 생각을 종종 해보곤 합니다. 물리적인 힘이 철저한 계산으로 이루어지는 벽과도 같은 거라면, 감정은 그렇게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는 것이란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아름다운 근원이 아닐까 싶군요.

by 카잔스카이 | 2008/05/26 19:44 | 플래티넘 카잔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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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Xiss君 at 2008/06/01 00:56
음..엘프와 무녀와 더불어 각종 시리즈에서 가장 단골로 다뤄지는 소재가 발키리지요...(...)
Commented by 카잔스카이 at 2008/06/01 21:53
하긴 게임에서도 자주 나오죠. 비단 직접적인 출현뿐만이 아니라 특정 부대의 명칭으로도 쓰여지더군요. 근데 솔직히 판타지에서 진짜 단골 소재는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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